01 · 히스팔리스에서 이시빌리야로
세비야는 바다에서 떨어져 있지만 배가 닿는 내륙 항구였다.
로마 시대의 히스팔리스는 과달키비르강 수계와 비옥한 평야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인근 이탈리카는 황제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강의 흐름은 오늘과 달랐고 홍수는 반복되었지만, 선박이 내륙 깊숙이 들어올 수 있다는 장점은 세비야를 서부 지중해 교역의 문으로 만들었다.
8세기 이후 이슬람 통치 아래 도시 이름은 이시빌리야로 변했다. 12세기 알모하드 왕조가 알안달루스의 수도로 삼으면서 성벽·궁전·대모스크가 확장되었다. 히랄다의 아래 부분은 그 대모스크의 미나레트였고, 토레 델 오로는 강과 항구를 통제하는 방어 체계의 일부였다.
1248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도시를 점령한 뒤 대모스크는 성당으로 바뀌었다. 후대의 거대한 고딕 성당이 들어섰지만 히랄다와 오렌지나무 안뜰은 남았다. 세비야의 대표 풍경은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완전히 대체한 모습보다, 새 권력이 이전 권력의 상징을 전유하고 변형한 결과다.
세비야의 강변에 서면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거리감이 도시의 장점이었다. 대서양과 연결되면서도 내륙의 평야와 길을 붙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길은 배를 들이고 곡물을 내보냈지만 홍수와 퇴적도 함께 가져왔다. 강이 도시를 먹여 살린 만큼 도시는 평생 강을 관리해야 했다.
히랄다는 한 시대의 종탑으로만 읽을 수 없다. 아래쪽의 미나레트는 알모하드 왕조가 이곳을 큰 이슬람 도시로 만들었던 순간을 남기고, 그 위의 종탑은 정복 뒤 바뀐 신앙과 권력을 보여준다. 같은 탑을 바라보면서도 높이에 따라 다른 시대를 보는 셈이다. 옆의 오렌지나무 안뜰까지 이어 걸으면 사라진 대모스크의 윤곽이 성당 한가운데 다시 떠오른다.
알카사르도 완성된 ‘무어식 궁전’이 아니다. 이슬람 시대의 유산 위에 기독교 군주들이 새로운 방을 만들고 장식을 의뢰했다. 중정의 타일과 물, 궁정의 벽면을 볼 때 누가 만들었고 누가 사용했는지를 나누어 생각하면 스타일 이름 하나로 붙잡을 수 없는 협업과 권력의 역사가 보인다.
강변에 남은 탑과 성벽을 보면 항구의 번영이 언제나 안전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품과 사람이 많이 움직이는 곳에는 세금과 감시, 방어의 장치도 필요했다. 토레 델 오로를 사진 속 장식이 아니라 물길을 통제하던 체계의 일부로 볼 때 세비야의 강은 아름답고 동시에 정치적인 공간이 된다.
성당 옆에서 히랄다를 올려다본 뒤 알카사르로 몇 걸음만 옮겨보자. 서로 다른 양식과 신앙의 층이 이렇게 가까이 놓여 있다는 것 자체가 세비야의 역사다. 도시는 앞 시대를 완전히 없애기보다, 남은 구조를 새 권위의 언어로 고쳐 쓰며 커졌다.
02 · 아메리카로 열린 독점항
1492년 이후 세비야의 강은 대서양 제국의 회계장부가 되었다.
16세기 초 스페인 왕실은 아메리카 무역을 관리하는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을 세비야에 두었다. 배와 화물, 선원, 지도와 항해 지식이 이곳을 거쳤다. 은과 상품이 들어오고 유럽의 물건과 사람들이 나갔다. 대성당 주변의 상인 거리와 오늘의 인디아스 고문서관은 종교·상업·행정이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는 궁전과 교회, 길드와 예술 후원을 키웠다. 무리요와 수르바란 같은 화가들이 활동했고, 세비야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제국의 번영은 식민지 정복과 강제 노동, 노예제, 불평등한 교역 위에 놓였다. 화려한 제단과 은의 흐름을 볼 때 그 비용까지 함께 떠올려야 한다.
17세기에는 전염병과 경제 위기, 강의 퇴적, 무역 중심의 카디스 이전이 겹치며 쇠퇴했다. 강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듯, 항로와 제도의 변화는 중심을 옮겨버렸다. 이 시기의 세비야 예술에 강한 종교성과 현실적인 인물 묘사가 공존하는 것은 번영과 불안이 동시에 존재했던 도시 분위기와도 연결된다.
인디아스 고문서관은 대성당과 알카사르 사이에 있다. 세 건물이 걸어서 몇 분 안에 이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사료다. 왕실의 명령, 종교적 정당화, 무역의 계산이 같은 중심에서 움직였다. 서류로 남은 제국은 항해의 용기만이 아니라 엄청난 행정의 힘으로 유지되었다.
‘신대륙의 은’이라는 말은 종종 빛나는 금속에서 이야기를 멈추게 한다. 그 은의 뒤에는 원주민 노동과 강제, 질병, 대서양 노예무역이 있었다. 세비야의 번영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비용을 지워서도 안 된다. 대성당의 규모와 상인의 집, 예술품을 볼 때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이 건물을 가능하게 했는지 질문해 보자.
17세기의 위기는 어느 하루에 갑자기 오지 않았다. 전염병, 경제의 흔들림, 항로의 어려움이 겹치고 무역의 중심이 점차 카디스로 옮겨갔다. 그래도 도시는 예술과 종교의 강한 중심으로 남았다. 벨라스 아르테스 미술관의 종교화가 오늘 강렬하게 보이는 것은 풍요만이 아니라 불안한 시대에 이미지가 맡았던 위로와 설득의 기능 때문이다.
항해의 시대를 말할 때에는 출항만큼 귀항도 상상해야 한다. 배가 돌아오면 물건을 검사하고 기록하고 세금을 매겨야 했다. 인디아스 고문서관은 이런 행정의 무게를 보여준다. 모험가의 이름보다 숫자와 서류, 통역과 선원의 노동이 더 오래 남아 제국을 설명해 준다.
돈이 모인 도시는 예술가에게도 일감을 주었다. 교회와 길드, 부유한 후원자의 주문은 제단화와 성화의 크기와 주제를 정했다. 벨라스 아르테스 미술관의 그림을 볼 때 화가의 재능뿐 아니라 누가 왜 이 이미지를 필요로 했는지 물으면 작품이 당시 사회의 기록으로 바뀐다.
03 · 전통을 무대로 만든 근대 도시
근대 세비야는 과거를 보존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연출했다.
19세기 여행자와 작가들은 세비야를 플라멩코·투우·집시 문화의 낭만적 무대로 소비했다.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의 여러 공동체와 음악 전통이 오랜 시간 섞여 만들어진 예술이지만, 관광의 시선은 복잡한 역사와 생활 조건을 종종 이국적 이미지로 단순화했다.
1929년 이베로아메리카 박람회는 도시를 크게 바꾸었다. 스페인 광장과 마리아 루이사 공원, 여러 국가의 전시관이 들어섰고 새로운 도로와 호텔이 만들어졌다. 이 건축들은 오래된 양식을 재해석해 스페인이 제국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와 연결된 중심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다.
오늘의 세비야에서는 성주간 행렬과 4월 축제, 동네 바의 일상이 거대한 관광 산업과 겹친다. 알카사르의 장식, 트리아나의 도자기, 강변 창고를 따로 보지 말고 권력·기술·노동이 이동한 하나의 네트워크로 보면 도시가 살아난다. 세비야의 역사는 강물처럼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퇴적되고 방향을 바꾸며 현재의 표면을 만든다.
트리아나의 도자기를 구경할 때에는 완성된 접시보다 가마를 먼저 떠올려 보자. 흙을 준비하고 굽고 시장으로 옮기는 기술은 강 건너편의 노동과 상업을 연결했다. 동네의 화려한 타일이 남긴 것은 취향만이 아니라 작업장의 시간이다. 도자기 센터가 옛 공장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이런 이야기를 눈앞에 놓는다.
1929년 스페인 광장의 반원형 건축은 사진 찍기 좋은 배경이지만, 동시에 스페인이 자신을 다시 설명하려 한 거대한 무대다. 각 지역을 상징하는 타일 벤치와 물길, 기념비적인 복도는 하나의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시대의 이상을 감탄하며 보되, 제국 이후의 관계를 어떻게 연출했는지도 함께 읽어보자.
세비야의 플라멩코를 한 공연장의 뜨거운 밤으로만 기억하지 말자. 노래와 기타, 발구름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집과 동네, 이주와 직업의 역사도 있다. 산타크루스의 관광객 많은 골목에서 트리아나의 생활 거리, 알라메다의 밤으로 걸어가면 도시는 같은 문화를 서로 다른 표정으로 보여준다. 여행자가 듣는 오늘의 음악도 그 긴 변화의 한 장면이다.
1929년 박람회 이후의 세비야는 관광객에게 보여줄 자신의 얼굴을 더 의식하게 되었다. 스페인 광장의 타일과 곡선은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근대의 설계가 과거의 양식을 선택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다. ‘진짜 옛날’과 ‘옛날을 상상한 근대’를 나누어 보는 재미가 있다.
오늘 트리아나의 공방과 강변 식당을 걷는 일도 이런 재구성의 연장선에 있다. 가마가 남은 자리는 박물관이 되고, 항구의 노동 공간은 전망 좋은 거리로 바뀐다. 그 변화가 지역의 기술과 사람을 어떻게 보존하거나 밀어내는지 생각하면서 걸으면 세비야가 과거형 도시로만 보이지 않는다.